이토는 조슈(長州) 번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조슈 번 무사, 이토 가문의 양자로 가게 되어 아시가루(足輕)라는 최하급무사 신분을 얻게 된다. 이토는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송하촌숙에 들어가 수학할 때 다카스기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등과 존왕도막(尊王倒幕) 운동을 벌인 일도 있다. 조슈 번 영국 유학생으로 선발된 이토는 타국에서 온갖 고생을 겪었다. 메이지 유신 후, 이와쿠라(岩倉) 해외사절단의 부사로 추가 선발되는 행운을 잡은 일을 계기로 귀국 후 신정부의 요직에 앉는다. 이때부터 이토는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1885년 초대총리가 된 이토는 천황제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대일본제국헌법과 황실전범을 만들고, 정한(征韓) 논쟁의 결정을 좌우하기도 했다. 총26장으로 구성된 『사전(史傳)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청년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살해되는 것으로 막을 내리지만, 청․일, 러․일 두 차례의 전쟁,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치열한 정치 교섭, 수많은 등장인물 묘사 등이 생생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일본 개화기 정치의 모습도 완전히 드러난다.
【주인공 이토의 이모저모】
일본의 많은 역사가들이 이토를 매우 주의 깊은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청나라와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도 그랬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때는 더욱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공러병 환자’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토는 신중했다. 청나라에 파병이 결정된 뒤에도 병력을 늘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갑자기 대군을 보내면 전쟁을 치를 의지를 과시하는 것으로 비쳐지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유소시대(幼少時代)」란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로부터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듣고 내가 가장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조선 국내 문제인 동학혁명에 왜 일본 군대가 출동해야 했느냐는 점이었다. 또 조선에 가서 왜 중국 군대와 교전했는가라는 점이다.’ 이토가 구로다 기요타카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이들보다 뛰어난 점은 이런 소박한 서민의 감정에 민감했다는 사실이다.
이토는 헌정당이 창당되었을 때 정부도 정당을 만들어 의정 당상에서 반대당과 당당히 대결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원로회의에서 반대에 부딪치자 당일로 사표를 제출했다. 총리직뿐 아니라, 소위 원로임을 증명하는 훈작까지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총리직을 벗고 이토는 입헌정우회를 창당한다. 그에게는 정치적 신조를 관철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배짱이 있었다.
이토는 구로이와 루이코(黑岩淚香)의 만조보(萬朝報) 지면을 통해 종종 공격받았는데, 1898년에 연재된 「축첩의 실례」에는 이런 식으로 소개되어 있다. ‘대훈위 후작 이토 히로부미의 엽색담은 그리 신기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도 많이 알려졌으나, 여기에 소개하는 사실은 진기한 것 중의 진기한 것이며 비밀 중 비밀이다.’ 즉 이토의 호색은 진기할 것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비빌 중 비밀이란 것은 …….
‘개인적으로 사람에 대한 좋고 싫은 감정을 억제할 줄 아는, 정치에서의 인간관계를 우선시할 줄 아는 인물이다.’ ―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의 천부적인 조정, 주선 능력은 정한논쟁을 둘러싼 정변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이토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풍체와 품격이었다.’
― 메이지 초기 정계의 흑막적인 역할을 한 실업가 고다이 도모아쓰(五代友厚)
들어가는 말
『사전(史傳) 이토 히로부미』에 관하여
1. 하급무사 출신
2. 유신 전야
3. 구미 사절단
4. 정한론
5. 비책
6. 천부적인 주선 능력
7. 세 영걸의 죽음
8. 정쟁
9. 헌법 조사
10. 총리를 향한 길
11. 녹명관
12. 오쿠마의 수난
13. 흑막 내각
14. 정치의 계절
15. 청 일 전쟁
16. 열강의 그림자
17. 숙명의 라이벌
18. 오월동주
19. 이해와 타산
20. 영 일 동맹
21. 개전 전야
22. 승리의 숨은 공로자
23. 포츠머스의 진실
24. 대한제국과 만주
25. 통감
26. 죽음으로의 여행
저자후기 - 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일본 정치변혁의 주역
역자후기 - 병탄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참고문헌